
2025년 파나마 Best of Panama 경매에서 게이샤 커피 1kg이 약 3만 달러, 한화로 4천만 원 수준에 낙찰되었습니다. 처음 이 수치를 접했을 때 저도 잠시 멈췄습니다. 커피 한 잔 가격이 웬만한 중형 승용차보다 비쌀 수 있다는 사실이, 커피를 오래 연구해온 저에게도 여전히 묘한 감각으로 남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파나마로, 전설이 된 품종의 배경
일반적으로 파나마 게이샤라고 하면 파나마 토종 품종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에티오피아의 Gesha 지역에서 발견된 품종입니다. 이후 중남미 전역으로 전파되었고, 파나마의 Hacienda La Esmeralda 농장에서 진짜 잠재력이 드러났습니다(출처: World Coffee Research).
2004년 Best of Panama 대회에서 이 농장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게이샤를 출품했고, 심사위원들은 컵을 마신 뒤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기존 스페셜티 커피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강렬한 플로럴 향과 티(Tea)처럼 이어지는 질감 때문이었습니다. 그 해 경매 가격은 당시 세계 최고가를 경신했고, 사실상 그 순간부터 커피 시장의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테루아(Terroir)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원래 와인 업계에서 쓰던 말로, 토양·기후·고도·일조량 같은 재배 환경 전체가 작물의 맛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게이샤 열풍 이후 커피 업계에서도 이 개념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파나마 보케테(Boquete) 지역의 화산토와 1,500~2,000m 수준의 고도, 큰 일교차는 게이샤가 천천히 성숙하도록 만들고, 그 과정에서 향미 성분이 복합적으로 축적됩니다.
게이샤가 비쌀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순히 희소성 때문만이 아닙니다. 핵심 요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수확량이 낮고 병충해에 취약해 농장 입장에서 리스크가 큽니다.
- 고도와 토양 조건이 맞지 않으면 같은 품종이어도 평범한 향미가 나옵니다.
- 두바이, 일본, 한국, 대만 등 전 세계 스페셜티 바이어들이 경쟁적으로 입찰에 참여합니다.
로스팅과 추출, 직접 검증해보니 달랐습니다
게이샤를 처음 만난 날 저는 일반적인 스페셜티 원두를 다루듯 접근했다가 낭패를 봤습니다. 조금만 과하게 볶으면 플로럴 향이 사라지고, 너무 얕게 볶으면 밸런스가 무너졌습니다. 로스팅 업계에서 흔히 쓰는 개념인 ROR(Rate of Rise), 즉 로스팅 중 원두 온도가 분당 얼마나 빠르게 상승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를 보면, 게이샤는 이 수치가 안정적으로 낮게 유지될 때 플로럴 계열 향미가 가장 잘 살아났습니다. 제 경험상 게이샤는 열을 얼마나 부드럽게 통과시키느냐가 핵심이었습니다.
마이크로랏(Micro-lot)이라는 개념도 제대로 체감했습니다. 마이크로랏이란 농장 내에서도 특정 구획, 특정 나무, 특정 수확 시기를 분리하여 소량으로 관리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게이샤처럼 조건에 민감한 품종은 같은 농장 안에서도 구획에 따라 향미 편차가 크기 때문에, 마이크로랏 단위로 관리하지 않으면 최상의 컵 퀄리티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추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계 바리스타 챔피언십(WBC)에서 게이샤 사용률이 높은 이유가 단순히 비싸서가 아니라는 건, 직접 추출해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변수 하나가 살짝 틀어져도 향이 날아가는 커피이기 때문에, 추출 기술의 정밀함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원두가 바로 게이샤입니다. 솔직히 처음 몇 번은 기대했던 향미가 전혀 나오지 않아 당황스러웠습니다. "이게 정말 그 게이샤 맞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요.
콜드브루로 처음 만난 게이샤, 그리고 남겨진 기억
콜드브루(Cold Brew)는 상온 혹은 냉장 온도에서 장시간 원두를 물에 침출시켜 추출하는 방식입니다. 열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산화가 느리고, 휘발성이 높은 향미 성분이 빠져나가지 않고 음료 안에 오래 머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콜드브루는 묵직하고 달달한 커피로 알려져 있는데, 게이샤로 내렸을 때는 그 전제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제가 처음 파나마 게이샤를 콜드브루로 추출하던 시절, 국내에는 콜드브루에 관한 데이터나 논문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대학교와 협업하여 직접 냉장 저온 추출 방식의 콜드브루 머신을 개발하고, 약 1년 동안 추출 시간, 수율, 냉장 온도, 산패 변화, 향미 유지력까지 하나씩 기록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커피 연구라기보다 과학적 접근에 가까웠습니다.
수율(Extraction Yield)이란 원두에서 실제로 물에 녹아 나온 성분의 비율을 뜻합니다. 커피 품질을 평가하는 핵심 지표 중 하나로, 수율이 너무 낮으면 맹맹하고 너무 높으면 잡미가 생깁니다. 게이샤 콜드브루는 이 수율 범위가 일반 원두보다 훨씬 좁았습니다. 조금만 벗어나도 그 섬세한 플로럴 향이 사라지거나 오히려 떫은 뒷맛이 남았습니다(출처: Hacienda La Esmeralda).
그러던 어느 날, 국내에 극소량 수입된 파나마 게이샤 생두를 예약 형태로 겨우 구했습니다. 생두 포장을 열던 순간의 긴장감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조심스럽게 로스팅한 뒤 저온 추출 머신으로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고, 잔을 들었을 때 올라온 자스민 향과 복숭아 같은 단맛, 홍차처럼 길게 이어지는 여운은 제가 그때까지 경험했던 어떤 콜드브루와도 달랐습니다. 커피색도 영롱하다고 표현하는게 맞는것 같습니다. 너무 아까워서 혼자 마시지 못하고 지인들과 조금씩 나누었는데, 한 모금 마신 뒤 몇 초 동안 아무도 말을 못 했던 그 분위기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 휴대폰에 딸아이의 닉네임이 'Esmeralda'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날의 기억이 그만큼 깊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게이샤 열풍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있습니다. 지금 스페셜티 시장의 일부는 품질보다 경매 가격과 희소성을 앞세우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커피의 본질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드는 음료인데, 가격 경쟁이 심해질수록 오히려 커피가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커피는 비싼 커피가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에 오래 남는 커피라고 생각합니다. 게이샤가 그 기준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참고: https://auction.haciendaesmeralda.com
https://varieties.worldcoffeeresearch.org/varieties/geisha-panama?utm_source=chatgp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