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로스터리 카페에서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콜롬비아 우일라에서 생산된 핑크 버번 내추럴. 처음 잔을 받았을 때부터 화사한 향이 인상적이었지만, 이 커피가 정말 놀라웠던 순간은 온도가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잔을 들었는데 처음과는 또 다른 향이 올라왔다. 커피가 식으면 향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어 있던 향들이 하나씩 풀려 나오는 듯했다.

처음에는 밝고 화사한 과일 향이 먼저 느껴졌다. 과일을 떠올리게 하는 산미와 단맛이 꽤 선명했고, 내추럴 커피 특유의 풍성함도 있었다.
그런데 온도가 내려갈수록 향의 폭이 더 넓어졌다. 화려한 과일 향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입안에만 머무르는 느낌이 아니라 코와 목을 지나 향이 온몸을 감싸고 도는 것 같은 순간이 있었다.
표현이 조금 과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날 저녁에는 정말 그렇게 느꼈다. 커피를 마신 뒤에도 그 뉘앙스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시간이 지난 뒤에도 잔에서 올라오던 향이 계속 기억에 남았다.
첨부된 원두 자료에는 패션후르츠, 망고, 카카오닙, 대추야자 같은 향미가 적혀 있었다. 산미 역시 달콤한 과일 산미와 숙성된 과일의 단맛으로 표현되어 있다.
내가 마셨을 때도 열대과일 계열의 화사함은 분명히 느껴졌다. 다만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특정 과일 하나를 정확히 찾아내는 재미보다는 여러 향이 겹쳐지며 만들어지는 긴 여운이었다.
| 구분 | 내용 |
|---|---|
| 생산 지역 | 콜롬비아 우일라 |
| 재배 고도 | 약 2,000m |
| 품종 | Pink Bourbon |
| 가공 방식 | Natural |
| 자료상 커핑 점수 | 86점 |
| 대표 향미 | 패션후르츠, 망고, 카카오닙, 대추야자 |
이 커피를 마시고 나서 계속 생각하게 된 부분이 있다.
아무리 좋은 생두를 가지고 있어도 그 생두가 가진 캐릭터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다면 이런 한 잔이 나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좋은 커피의 출발점이 좋은 생두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두의 잠재력이 그대로 한 잔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생두라도 어떻게 로스팅하느냐에 따라 향의 방향과 단맛, 산미의 선명도, 질감이 달라질 수 있다.
특히 핑크 버번처럼 향미가 섬세하고 화사한 커피라면 생두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억지로 강하게 만들어내기보다 원래의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로스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추출이 남는다.
로스팅을 잘해도 물의 온도나 분쇄도, 물을 붓는 방식, 추출 시간에 따라 한 잔의 인상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날 마셨던 커피가 온도가 내려간 뒤에도 향과 단맛이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더 풍부하게 느껴졌던 것을 생각하면, 단순히 좋은 원두를 사용했다는 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좋은 생두를 고르고, 그 커피가 가진 캐릭터를 로스팅으로 살리고, 마지막 추출까지 정성을 다해야 비로소 한 잔이 완성되는 것 아닐까.
그날 마신 커피는 그 과정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커피를 오래 마시다 보면 맛있는 커피와 기억에 남는 커피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밸런스가 좋고 깔끔한 커피는 많다. 점수가 높은 커피도 많다. 하지만 한 잔을 다 마신 뒤에도 그 향이 계속 떠오르는 커피는 흔하지 않다.
이 콜롬비아 우일라 핑크 버번은 내게 그런 커피였다.
따뜻할 때도 좋았지만 조금 식었을 때, 그리고 더 식었을 때가 훨씬 좋았다. 잔의 온도가 내려갈 때마다 감춰져 있던 향이 하나씩 나타나는 것 같았고 마지막 몇 모금은 빨리 마시기가 아까웠다.
식으면 식을수록 환상적인 향이 온몸을 감싸고 돌았던 커피.
좋은 생두, 그 생두의 개성을 이해한 로스팅, 그리고 마지막 핸드드립 추출까지. 어느 한 과정만 잘해서는 쉽게 나오기 힘든 결과였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한동안 핑크 버번이라는 이름을 볼 때마다 그날 저녁에 마셨던 한 잔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